- 노아의 홍수(6~8장)

노아의 홍수(6~8장)

창세기 6~8장 (마태복음 24장 37~39절, 누가복음 17장 26~27절, 베드로후서 3장 3~13절)

노아(때)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일찍이 있었던 일의 사실의 기록이다. 패사(稗史, 소설체의 역사 127p 참조)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서사적 영웅시는 아니다. 진지한 기록이다. 물론 그 가운데 오늘날의 과학, 또는 사학으로서는 해득하기 어려운 많은 사실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있다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의 해석은 언제나 뒤를 따를 것이다. 주 예수께서 사실로 인정한 이것을 우리들도 역시 그대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성실하신 그가, 그의 미래를 소설같이 말했으리라고는, 아무리 해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노아의 홍수 비슷한 전설이 옛 바빌론의 기록 중에 남아 있다고 해서, 성서의 기사를 이방의 전설의 가필로 볼 필요는 더욱 없는 것이다. 바빌론인의 홍수담은 분명히 소설이다. 엄정한 성서의 기사와 비교할 바도 못된다. 만약 또 억지로 사실의 과학적 설명을 구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서방 아시아 이해(Caspi해)의 유역에 일어났던, 지질적 대변동의 결과로서 볼 수가 있으리라. 지금 그것에 대하여,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기사의 성질에서 볼 때,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상에서 본 노아의 홍수에 관하여는 J. W. 도슨 저 `지질학과 역사의 접촉점`(Meeitng Place of Geology and History)은 많은 암시를 독자에게 주리라.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앙적 교훈을 준다. 패사소설 교훈 역시 안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보다 나은 교훈은 없는 것이다. 성실한 문사는 할 수 있는 대로 소설을 피하고, 역사를 말한다. 역사는 최상의 윤리서이다. 문사 역시 그렇다. 하물며 하나님께 있어서랴! 하나님의 교과서는 천연과 역사이다. 성서는 최상의 역사이다. 가정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역사이다. 성서를 소설화할 때, 성서의 권위는 상실되는 것이다. 노아는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우리들과 같은 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대홍수 때 겪은 체험, 그 체험이 후세를 가르치고, 5천 년 후의 오늘날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설,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이 영구적 가치를 가지지는 못하는 것이다. 성서의 성서로서의 가치는 주로 그 인류의 실험 기록이기 때문이다.
노아는 의인이었다. 특히 신앙적 의인이었다. 그는 소위 성인은 아니었다. 완전 무흠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창세기 제9장 18절 이하의 기사를 보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의인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11:7 히 11:7)`

이렇게 노아도 아브라함과 한가지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입고, 그 신앙의 보상으로서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로 인하여, 전 세계를 멸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바 인류를 멸하실 리가 없다. 특히 그 죄라지만, 꼭 이것을 죄로 인정할 바도 못 된다. 육에 따르기 마련인 결점으로 보면, 이를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는 진보의 도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완전은 그 피할 수 없는 바의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불완전 때문에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을 멸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이는 믿기에 아주 어려운 일이다. 특히 임박한 멸망에서 피하기 위하여, 길이 450척 여, 넓이 75척, 높이 45척 여의 대선을 만들라고 계시에 접하여, 노아의 신앙은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조소를 불러올 것 치고서 이것보다 큰 것은 없다. 그저 마음에 믿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주시 앞에서 이 대선을 만들라는 것이다. 바보인가 미치광이인가 만약 그가 재세 당시에, 오늘에 있어서와 같은 지자, 식자가 있었다면 그의 기도는 미망이든가,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는 소리(야유) 중에 묻혀가려 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믿었던 것이다. 순종했던 것이다. 조소를 받으면서 대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이에 따르는 구원을 대망했던 것이다. 노아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었다. 그도 또한 성서적 위인이었고, 믿는 까닭에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도 역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그리스인(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신앙과 미망과는 그 외면에 있어서는 아무런 다른 데가 없다. 한가지로 비과학적이요, 한가지로 비합리적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를 아는 것이다( 1:24 고전 1:24). 그 밖에도 노아의 신앙적 실험(체험)에 있어서 우리들 오늘의 신자는 크게 배울 바가 있다. 실로 노아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그것만큼 큰 것이었다. 특히 불신의 세상에 대하여, 신앙을 유지했던 용기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오히려 이것을 노아에게서 배우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요, 교훈인 노아(때)의 홍수는 그 밖에 또 커다란 예언이다. 대홍수는 세상 심판의 모형이다. 홍수 이전의 세상이 이때 심판 받아, 그 종말을 고하고 신천신지가 나타난 것 같이, 우리들이 생존하는 오늘의 이 세상도 또한 한가지로 심판 받고, 대신 보다 더 새로운 천지가 출현되는 것이다. 홍수 이전의 세상이 갑작스러운 재난으로써 멸망되었듯이,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날의 이 세상도 역시 한가지로 멸망되고, 그 후에 성도가 다스리는 천국이 출현하는 것이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라는 구절은 오늘도 그때(홍수 이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인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자기 것으로 삼고, 이것을 자기 임의로 이용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또 하나님의 것을 드리려 하지도 않고서, 하나님을 없으신 이나 다름없이 취급하고, 또 그를 우롱하며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가 어찌 죄인을 벌하랴!`고. 그들은 과학과 철학에만 치중 의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심판하면서 하나님께 자기를 심판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물의 자연적 진화에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써 이에 간섭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대심판이 필경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 들을 때면, 조소로써 이를 맞이하고, 멸시로써 이를 물리친다. 홍수 이전의 세계를 확대한 것이 오늘의 세계이다. 그 죄의 절대함이라든가, 그 불신의 심대함, 그 으쓱거림의 고대함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때까지 오늘날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세를 비관해서가 아니다. 명백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아는 자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가이다. 철학박사가 아니라 실무가이다. 인세와 직접 접촉을 하고 있음을 의심하려 해도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소수의 노아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의 방주의 건조를 명하시는 것이다. 바야흐로 구천구지는 사라지려 하고, 신천신지는 출현되려 하고 있다. 그런데(이것은) 성인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연의 진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간접에 의해 옛 것은 멸절되고, 새것은 세워지려 하고 있다. 이에 있어서, 부르심을 입은 소수자의 인내와 용기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아가 그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훌륭한 증명자로서 일어선 것처럼, 부르심을 입은 `적은 무리`는 멸시와 조소를 일신에 받아 가면서 복음 증명의 요지에 임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노아의 원형이다. 하나님은 노아로써 시초의 소세계를 구한 것처럼, 예수로써 종말의 대 세계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그 십자가의 피로써 속함 받은 자이다. 그리고 노아의 구원이 금수, 곤충, 모든 산 자에게 미친 것같이, 예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앞에 신천신지가 포함되어 있듯이 예수의 교회 안에 새로운 하늘과 땅은 함유되는 것이다. 대심판이 이 세상에 임하여 그 제도, 문물, 그 자랑거리로 하는 문명의 산물이 모두 다 멸실되어 버리는 때에, 예수의 방주에 있는 자만이 남아 이로써 새로운 세계가 조출되는 것이다. 천연에 법칙이 있음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데도 또한 법칙이 있다. 죄가 무르익고 악이 그 극에 달할 때, 심판은 임하고, 악자와 그 역사는 멸망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3:13 벧후 3:13)`가 있으므로, 괴멸 중에서 새로이 건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종말은 그 절멸은 아니다. 그 개조이다. 보다 좋은 세계의 건설이다. 하나님은 이 법칙에 따라, 우주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1918년 7월 성서지연구)